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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0년(嘉靖9) 退溪 李滉의 仲兄 李瀣의 [敎旨] 1점

1530년(가정9) 퇴계 이황의 중형 이해의 [교지] 1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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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000

물품번호

59 (1912MBSZZB4)

경매일자 2020.01.22 15:00:00
남은시간

 

1529(嘉靖8) 1226일에 退溪 李滉仲兄 李瀣承文院 副正字로 임명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찢어진 곳 있으며 입찰 전 상태 반드시 확인 요망. 세로 48cm, 가로 70cm.

 

[참고] 이해 (李瀣, 1496~155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명(景明), 호는 온계(溫溪). 선산 정()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진사 계양(繼陽)이고, 아버지는 식진사 식()이며, 어머니는 사정(司正) 박치(朴緇)의 딸이다. 退溪 이황(李滉)의 형이다. 어려서 작은아버지 우()에게 글을 배워 1525(중종 20)에 진사가 되었고, 152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33년에 사간·정언 등을 거쳐 1541년 직제학에 올랐으며, 이어 경상도진휼경차관(慶尙道賑恤敬差官좌승지·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544년에 첨지중추부사·대사헌·대사간·예조참판을 지내고, 이해 또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인종이 즉위한 뒤에도 계속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권신 이기(李芑)를 우의정에 탁용(擢用 : 발탁하여 등용함)하려는 것을 반대하고 탄핵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이기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1545(명종 즉위년) 강원도관찰사에 이어 1547년에 황해도관찰사, 1549년에 청홍도관찰사를 거쳐 1550년에는 한성부우윤이 되었다. 그러나 명종이 즉위하면서 소윤이 득세하였기 때문에 이기의 심복인 사간 이무강(李無彊)의 탄핵을 받아 무고사건에 연좌된 구수담(具壽聃)의 일파로 몰리게 되었다. 그 때 주위사람들이 권세에 거짓으로 굴복하면 모면할 수 있다고 권하였으나 거절하였으며, 마침 김안로(金安老)가 인근에 살았으므로 권세로 이끌려 하였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그러나 명종이 그의 결백함을 알고 특별히 갑산에 귀양보내는 것으로 그쳤지만, 귀양가는 도중에 양주에서 병사하였다. 예서(隷書)에 뛰어났으며 선조 때 벼슬이 환급되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영주의 삼봉서원(三峰書院), 예안의 청계서원(淸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민(貞愍)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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