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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품 크기 | 12.5x1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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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조국 | 유럽 |
희귀한 최소 100년 이상 된 것으로 추정되는 골동품 빈티지 알람 시계입니다.
과거 중국이 독일제국의 식민지일 때 제조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오래되어 세월감이 느껴지며 제조 독일(德國)이라고 쓰여있습니다.
수집 가치가 있는 희귀한 물건입니다.
수집용, 교육용, 디피용으로 추천합니다.
근대사 역사자료 수집용으로 좋습니다.
개인안목으로 잘 아시는 분만 신중하게 입찰해 주세요.
자세한 건 사진을 참고해 주세요.
청나라와 프로이센 왕국은 19세기에 수교했다. 동시에 칭다오를 점령해서 식민지로 삼은 적이 있었다.[1] 그리고 독일 제국은 키아우초우외에 톈진 조계를 식민지로 둔 적이 있었다.
독일은 중국과의 교류가 많다. 문화적인 교류도 있고 칭다오는 독일의 지배를 받아서 독일의 흔적이 남아 있다. 독일은 AIIB에도 가입되어 있다. 하지만 중국이 점점 세력을 키우면서 독일도 중국을 견제하고 있다.
독일 제국이 1898년 부터 1914년까지 청나라로부터 산둥 반도 이남을 임차받아 통치한 조차지를 말한다. 독일 제국 해군 아시아 전단의 본거지였다.
본래 독일 제국은 청으로부터 99년, 1997년까지 임차하기로 계약하였으나, 그 전에 독일 제국이 망해버리고 말았다.
'키아우초우(Kiautschou)'란 중국 산둥 반도 이남의 만(灣) 이름인 '자오저우(Jiāozhōu[膠州])'를 옮긴 것이다. 당시 중국어의 연구개음(ㄱ계 자음) 구개음화가 덜 진행되어 '膠[jiāo]'가 '자오(←쟈오)'가 아니라 '갸오' 비슷하게 읽혔기 때문.[2] 'tschou'는 한어 병음 'zhou', 웨이드-자일스 표기 'chou'의 독일식 표기.
서구권에서는 대체로 이 시기의 해당 지역을 '키아우초우'라는 독일식 발음으로 부른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자오저우만'을 한국 한자음으로 읽은 '교주만(膠州灣)'이라는 표기가 압도적으로 많이 쓰인다.
19세기 중엽, 독일 제국은 다른 서양 열강들처럼 식민지 경쟁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국가의 통일이 늦어 뒤늦게 시작하다보니 이미 대부분의 지역들은 기존의 열강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나마 침투할 만한 곳을 몰색하던 독일 제국은 키아우초우를 발견하였다.
당시 키아우초우는 청나라의 영토였는데, 전체적으로 낙후된 지역이라 어느 서구열강들도 이곳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3] 그러나 독일 제국은 이런 키아우초우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1888년, 황제 빌헬름 2세의 등장과 함께 추진된 '신노선 정책(Neuer Kurs)'에 따라 독일 제국은 팽창주의적 외교노선을 대외적으로 표방하기 시작하였다. 1890년, 식민지 정책에 있어 온건적이었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퇴임하고, 독일 제국은 본격적으로 세계 정책을 실현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기존의 전통적인 육군 중심에서 해군 중심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러나 독일 제국의 해군력은 대영제국의 대함대(The Grand Fleet) 보다 열세였고, 독일 제국은 순양함대를 중심으로 적국의 통상로를 차단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정기적으로 순양함에 석탄을 공급하기 위한 해군기지 확보가 필수적이었다. 빌헬름 2세는 청일전쟁으로 혼란스러운 청나라에 접근하였다. 빌헬름 2세의 지시 아래 독일 해군소장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 제독은 1896년 부터 1897년까지 두 차례에 걸친 탐사 후, 석탄 매장량과 철도 건설 및 자원 개발의 가능성이 높은 산둥성 자오저우를 최적지로 선정했다.[4]
이런 독일 제국에게 있어 하늘이 내린 기회가 찾아왔다. 1897년 11월 1일 마반장장 촌에서 다다오 회(大刀會)의 반양교 운동 중, 독일인 선교사 2명이 피살당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었다. 이 사건을 거야 교안(巨野敎案)/거야 사건이라 한다. 살해당한 선교사는 프란츠 크사버 니츠(Franz Xaver Niez), 리하르트 헨레(Richard Henle)였으며, 독일 제국은 이 사건을 빌미로 청나라를 침략하기 시작했다.
1897년 11월 7일 상하이에 주둔 중인 독일 제국 함대 사령관은 독일 황제로부터 순양함 4척을 이끌고 키아우초우를 점령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11월 14일 키아우초우에 도착한 독일 함대는 군사훈련을 구실로 해군 600명을 상륙시켰고, 그곳에 있던 청나라 군대를 창커우까지 퇴각시켰다. 12월 17일까지 청나라 군대는 독일 해군에 의해 키아우초우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이로써 키아우초우는 독일 제국의 점령지가 되었다. 이후 독일 제국은 청나라 정부와 교섭하여 '중국-독일 교오조계조약(中德膠澳租界條約)'[5]을 체결, 독일 제국은 키아우초우를 99년 동안 조차하게 되었다. 이 조약에 근거하여 독일 제국은 키아우초우 뿐만 아니라 산둥 반도 거의 전체를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1898년 4월 27일, 빌헬름 2세는 키아우초우 지역을 보호령으로 지정한다는 내용의 칙령을 반포하였다. 이후 독일 원동함대 사령관이 키아우초우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키아우초우는 독일 해군청이 직접적으로 통치하였다. 이는 독일 외무부의 통제 하에 있었던 다른 독일 제국의 식민지와는 다른 키아우초우만의 특징이었다.
독일 제국은 1899년 6월부터 측량을 개시, 동년 9월 23일부터 자오지 철도(膠濟鐵道)를 정식으로 시공하기 시작했다. 이 철도는 독일 은행단의 독점 투자기관인 덕화철로공사(德華鐵路公司)[6]가 건설하였다.1901년 4월 9일 칭다오 - 자오저우 구간이 완공, 1902년 6월 1일에는 웨이현(濰縣)까지 개통되었다. 1904년 6월 1일, 1896년에 체결된 조계조약에 근거하여 건설하던 선로가 모두 개통되었다. 자오지 철도에 의해 독일 제국은 산둥 반도 내부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1913년에는 독일이 철도의 연장선 권리도 얻었으나,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일본 제국이 키아우초우를 점령하면서 무산되었다.
독일 제국이 키아우초우를 점령한 뒤의 통치는 전체적으로 강압적이었다. 총독부는 유럽인 거주지역과 중국인 거주지역을 엄격히 분리했으며, 유럽인 거주지역이 식민 통치의 중심지가 되었다.
독일 제국의 키아우초우 통치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 제국이 점령하면서 종료되었다. 일제는 한동안 이곳을 지배하다가 1922년 워싱턴 회의의 결과에 따라 중국으로 반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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