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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조국 | 한국 |
두산서당은 임진왜란 때 세 아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맞서 싸웠던 문옹(汶翁) 김석견(金石堅, 1546~1614년)을 봉향하기 위함이었다. 1798년(정조 22)에 두산사(斗山祠)라는 사당의 이름으로 지어졌다. 그런데 사당의 안에는 글공부를 할 수 있는 강당이 있어서 배향과 글공부라는 두 기능을 하는 서원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그 기능을 수행해 왔다. 그래서 1872년(고종 9)에 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렸을 때 훼철(毁撤)이 되었다. 그렇게 두었다가 1919년 사당을 고쳐 지으면서 두산서당(斗山書堂)이라는 편액을 달아 서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 때문에 전사청까지 갖춘 서당으로 남게 되었다. 서당이면서 제향을 올리는 특이한 경우가 된 것이다.
김석견의 의병활동
문옹 김석견(1546~1614년)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인물이다.
그의 활약상은 그가 기록한 『문옹실기(汶翁實記)』(1946년 출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3권 1책인데 본 제목은 김석견의 호를 따온 『문옹선생실기』였다. 김석견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백성들이 피해를 보고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그의 세 아들 김몽수(金夢秀), 김몽량(金夢良), 김몽남(金夢男)과 함께 경주에서 창의(倡義)를 했다. 이들은 적극적으로 의병활동을 펼쳐 나갔는데, 경주성 탈환 등에 큰 공훈을 세웠다. 주로 명활산(明活山)과 동화산(棟華山) 등지를 배경으로 활동을 하면서 왜군을 격파하고 군수품을 빼앗았다. 왜군에게 심각한 피해를 준 것이다.
그러나 김석견도 많은 피해를 입었는데, 사랑하는 둘째 아들 김몽량이 1596년 군량을 운반하다가 왜군에게 적발되어 순국하였다. 그리고 자신도 창암전투(倉巖戰鬪)에서 부상을 당하게 된다. 이들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기간 내내 의병으로 싸우다가 1599년 1월 왜군이 완전히 퇴각한 후 의병을 해체하였다. 전쟁의 슬픈 역사를 『문옹실기』에 기록해서 실상을 볼 수 있게 하였다. 김석견은 아들 김몽수와 김몽남과 함께한 의병활동이 알려져서 1605년(선조 38)에 원종3등 공신에 올랐다. 1876년(고종 13)에는 통정대부(通政大夫)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추증되었다.
[출처] 김해김씨 - 김석견의 두산서당(斗山書堂)1798년|작성자 허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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