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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조국 | 조선 |
조선 중기의 진사 장여화(張汝華, 1566년~1621년)
본관은 인동(仁同, 玉山), 자는 무보(茂甫), 호는 사계(砂溪), 출생지는 영천(榮川)이다.
적개공신(敵愾功臣) 장말손(張末孫)의 후예로 조부는 장응신(張應臣), 생부는 장수희(張壽禧), 모는 창원황씨(昌原黃氏) 황사언(黃士彦)의 딸이다
1566년(명종 21) 영주에서 출생한 장여화는 어려서부터 강대(剛大)한 기품과 엄숙한 몸가짐으로 주위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인물이었다. 게다가 부모에게는 지극한 효성을 다하고 형제 사이에는 화평한 관계를 한시도 잃지 않았으며, 독서를 할 때에는 의리의 탐구에 정밀하였고 일을 처리할 때에는 핵심을 꿰뚫어 시비를 판별하였다.
다른 사람과 다름을 염려하지 않으며 오직 올바른 몸가짐을 지키기에 전념하였으니, 1609년(광해군 1)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지만, 광해군의 패정(悖政)을 보고서 고향으로 내려와 두문불출하며 몸가짐을 바르게 하는 데에 힘쓴 것은 그의 성품으로 보아 당연한 일이었다.
고향으로 내려와 학문에 힘쓰며 절의(節義)를 떨치다
고향인 영천으로 낙향한 장여화는 전계초당(箭溪草堂)을 짓고 학문에 전념하며, 시를 통해 세도(世道)를 염려하는 은자(隱者)의 뜻을 담아내었다. 그런데 인근에 거주하던 이강(李茳)이라는 자가 권신 이이첨(李爾瞻)의 세력에 빌붙어 영주의 선비들을 꾀어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하고 나섰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이강을 추종하였지만, 장여화는 그 같은 세태를 개탄하며 밤마다 탄식하곤 하였다.
그러던 중 1617년(광해군 9) 이강의 친척이 진사시에서 장원을 차지한 뒤 함께 급제한 사람들을 이끌고 부도(不道)한 말을 담은 상소를 임금에게 올렸다. 장여화는 분연히 “인륜이 끊어져 장차 화란(禍亂)이 우리 고을에 미칠 것이니, 내가 어찌 한 몸의 화를 두려워하여 온 고을이 이적(夷狄)과 금수(禽獸)의 지경에 떨어지는 것을 앉아서 지켜볼 것인가? 내 힘이 그들을 벌하여 저잣거리에 널어놓기에는 부족하지만, 그들의 이름을 유생의 명부에서 삭제하여 징벌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향교에 들어가 그들의 이름을 삭제해 버렸다. 그러자 이강의 무리들이 그의 집 앞을 지나며 “네가 내 이름을 잘라내었으니, 나는 네 머리를 자르겠다.”라고 여러 차례 협박하여도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그 후 광해군의 정치가 더욱 혼란해지던 1621년(광해군 13)에는 곽진·김시추(金是樞) 등 동료들과 더불어 이이첨의 머리를 벨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러 서울에 갔다가 병을 얻어 6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친구 곽진(郭진[山+晉])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 가운데 “지금의 영천이 영천일 수 있는 것은 오직 그의 덕택 때문이다.”라고 칭송할 정도로, 광해군 연간 영주 지역 선비의 기개가 뿌리내리도록 한 그의 공로는 사후에도 널리 추앙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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